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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조문 행렬…외교 사절도 잇따라 방문

19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향소가 마련된 뉴욕총영사관과 플러싱 열린공간, 뉴저지한인회에는 하루종일 조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총영사관에 따르면 이날 하루 130여명이 영사관 1층 리셉션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오전 9시 분향소가 문을 연 직후에는 김경근 뉴욕총영사를 비롯, 총영사관 임직원들이 합동으로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이어 하용화 뉴욕한인회장 등 한인회 임직원들이 분향소를 찾는 등 주요 단체장들과 일반 동포들이 분향소를 찾았다. 또 에번스 리비어 코리아소사이어티 회장, 뉴욕시 의전관, 주뉴욕일본총영사, 주뉴욕필리핀총영사 등이 찾아와 조문했다. 영사관 1층에는 이와는 별도로 유엔대표부가 별도의 분향소를 마련, 외교사절을 맞았다. 대표부가 마련한 분향소는 외교 격식에 따라 헌화 대신 방문객들이 서명록에 추모 메시지를 남기고 돌아갔다. 범미주 뉴욕동포 김대중 대통령 추모위원회가 마련한 플러싱 열린공간 분향소에도 이날 하루 80여명이 조문하고 돌아갔다. 위원회측은 오후 10시까지 분향소 문을 열어, 생업에 종사하는 동포들이 늦은 시간에도 조문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뉴저지한인회가 마련한 분향소에는 배기현 뉴저지상록회장이 가장 먼저 찾아와 조문했다. 이어 전병관 전 뉴욕한인회 이사장, 김경훈 뉴저지한인회장 등 뉴저지 지역 단체장들이 차례로 헌화 했다. 안준용·신동찬·강이종행 기자 jyahn@koreadaily.com

2009-08-19

김 전 대통령 '6일 국장'…북한 최고위급 조문단 파견

정부가 관례를 깨고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를 최고 예우인 국장(國葬)으로 엄수하기로 결정했다. 이 같은 결정에는 지난 50년간 한국 정치의 거목으로서 그가 이룩한 업적과 성과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한평생 민주주의와 민족화해협력, 인권에 헌신한 김 전 대통령의 영면에 대한 국민적 애도 분위기를 담기에 국민장(國民葬)이라는 형식은 너무 작은 ’그릇‘이라는 지적을 감안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날 국무회의 직후 브리핑에서 “유가족의 뜻을 존중하고 고인의 생전 업적을 기리며 이를 통한 사회통합의 대승적 의의를 위해서 국장을 추진키로 의결했다”고 설명했다. 장례위원장은 한승수 국무총리가 맡기로 했다. 정부는 애초 관례와 형평성에 따라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거행할 방침이었다. 특히 청와대와 정부는 이날 저녁 8시 임시 국무회의가 열리기 직전까지도 국장 여부를 놓고 논란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원칙과 관례, 차후 전직 대통령 장례에 미칠 파장을 고려해 국민장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으나 호남의 민심과 향후 대야관계, 원활한 국정운영 등을 감안해 국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러한 논란과 진통은 이명박 대통령이 ’대승적 차원‘에서 국장을 엄수키로 결단을 내리면서 신속하게 정리됐다는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장례=국장기간은 6일장으로 하고 영결식은 국장 마지막날인 23일 일요일 오후2시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거행되면 장지는 국립 서울 현충원으로 결정됐다. ■북한 조문단=북한은 김 전 대통령 서거와 관련, 최고위급 ’특사 조문단‘을 파견한다고 발표,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특사 조문단은 김기남 당 비서를 단장으로 21일부터 1박2일간 서울을 방문한다. 북한의 최고위급 조문단이 서울 방문 일정을 1박2일로 결정함으로써 조문단의 방남을 계기로 남북 당국간 고위급 접촉이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예상도 제기되고 있다. ■분향소=김 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한 공식 분향소가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미주는 물론 한국 곳곳에 설치되면서 조문객들의 발길도 줄을 잇고 있다. 북가주 지역선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에 이어 실리콘밸리 한인회, 이스트베이 봉사회 등에도 분향소를 설치했다. 한국선 120여개 지역에 분향소가 설치돼 첫날에만 5만3000여명의 조문객이 다녀갔다.

2009-08-19

분향소 서버브에도 있었으면…한인회관-총영사관만 설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지는 가운데 일부 한인들은 서버브 지역에도 분향소가 설치되기를 바라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한인회관에 분향소가, 총영사관에 조문소가 설치됐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에는 두 곳과 함께 샴버그 래디슨호텔에도 분향소가 마련된 바 있다. 한인들 중에서는 한인회관의 지리적인 제약을 들며 한인 밀집지역에도 분향소가 설치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롤링메도우에 거주하는 이명재씨는 “한인회가 위치하고 있는 시카고까지 내려가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서버브 지역에 분향소가 설치된다면 많은 한인들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인회는 “아직까지 추가 분향소 설치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지만 한인들이 밀집해서 살고 있는 북서부 서버브 지역에도 분향소가 설치되면 좋을 것“이라며 “하지만 계속 인원이 상주해야 하는 등의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호남향우회 홍병길 회장도 “서버브 분향소에 대해서는 얘기가 없었지만 많은 한인들이 원한다면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박춘호 기자 polipch@koreadaily.com 박춘호 기자

2009-08-19

'그는 비상하고 집념 강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워싱턴 인맥 무궁화교회 박문규 목사 인터뷰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향소가 차려져 있는 워싱턴한인연합회 사무실. 한켠에 생활한복을 입고 조문객들과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박문규(74) 목사(사진)는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박 목사는 “김대중 선생을 만난 건 1982년 내셔널 에어포트에서였다. 미국, 일본 기자를 비롯해 환영객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면서 “문동환 목사님이 버지니아에 수도장로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고 또 김대중 선생이 만든 민통(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을 재정비하던 때였다”고 회상했다. 당시 민통의 워싱턴지방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박목사는 이러한 인연으로 민통의 의장이었던 김 전 대통령과 2년 반이라는 시간을 워싱턴에서 함께 했다. 박 목사는 김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시간은 항상 바빴다며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각종 집회와 강연을 수시로 했고, 한달에 한번은 김 선생이 자신이 살던 아파트 파티룸에 동포들을 불러 친교의 시간을 가질 만큼 동포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고 밝혔다. 또 “김 선생은 내가 보기에 머리가 무척 좋으셨던 것 같다. 비상한 판단력으로 정곡을 집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면서 “게다가 집념이 무척 강했는데 말은 안 했지만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집념이 그 누구보다 강해 보였다”고 전했다. 반면 고집도 무척 강해 주변사람들이 직언하는 것을 많이 주저했다고도 말했다. “김 선생이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을 때였는데 모두들 ‘김 박사님 김박사님’하면서 부르니까 가만히 계시던 문동환 목사께서 ‘김선생님은 김박사라는 호칭보다 김선생이란 호칭이 더 어울린다’고 하자 그렇게 부르라고 했다”며 “모임이 있을 때도 주변 사람들이 김 선생의 말에 반대의견을 제시하지 못했을 정도로 항상 강한 면을 보여줬다”고 회상했다. 홍알벗 기자

2009-08-19

김대중 전 대통령 '한마음 애도' 한인연합회 추모제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조문객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워싱턴한인연합회(회장 김영천)가 18일 한인연합회관에 마련한 분향소엔 19일 오전부터 각 한인단체장을 비롯한 일반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김영천 워싱턴한인연합회 회장은 “대한민국 민주주주의 깃발이자 상징인 김 전 대통령이 가셨다”면서 “한국민과 우리 동포들은 따뜻한 마음으로 그분을 가슴에 담고, 정성과 사랑, 열정으로 그분을 떠나 보내려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워싱턴한인연합회는 오는 22일(토) 수도장로교회(담임목사 조명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기리는 추모제를 개최할 계획이다. 워싱턴한인연합회는 이날 추모제에선 오케스트라의 추모연주 및 성악가들의 추모곡 공연과 함께 생전의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을 담은 동영상 상영, 그리고 기도가 엄숙하고 경건하게 마련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주미한국대사관에 마련된 분향소엔 19일 오전 한덕수 주미한국대사를 비롯한 공관 근무자들의 조문에 이어 이동희 민주평통 워싱턴협의회장, 한인회장 등 각계 단체장 및 일반인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19일 한인연합회관 분향소를 찾은 지역 인사는 워싱턴체육회 한광수 회장 등 임원, 북버지니아 한인회 강남중 전 회장, 요나장로교회 허권 목사, 사람사는세상-워싱턴의 이덕근 대표, 워싱턴-버지니아 한인노인연합회의 박숙향 수석부회장, 알라딘서점의 이형열 대표, 워싱턴중부향우회의 김만경 회장, 13기 민주평통의 이용진 전 회장과 전 임원, 미주한인회 총연합회의 최병근 전 회장, 정일순 워싱턴한인연합회 이사장과 김영천 회장 등 임원, 수도권 메릴랜드 한인회 신근교 회장, 워싱턴상공회의소 김성찬 회장, 사단법인 대한민국 미주 베트남유공전우회 임황묵 회장 등 임원, 하나님의 말씀교회의 김양일 목사, 재미함경향우회의 주남훈 회장, 이현곤 태권도 관장, 민주동지회의 김재숙 회장 등이다. ▷한인연합회관 분향소 문의: 703-354-3900 홍알벗 기자 alberthong@koreadaily.com

2009-08-19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민족의 큰 별 졌다' 한인들 애도 물결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43분(한국 시간) 서거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뉴욕 동포사회에서도 애도의 물결이 일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특히 미국 망명시절 뉴욕, 워싱턴을 무대로 민주화 투쟁과 통일운동을 전개하면서 동포들과 폭넓은 유대관계를 유지, 고인에 대한 추모열기가 고조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을 기억하는 한인들은 고인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한국의 큰 정치 지도자를 잃었다”며 슬퍼하고 있다. 뉴욕총영사관은 19일부터 분향소를 설치, 조문을 받기로 했다. 시간은 오전 9시~오후 5시이며 장례일까지 운영될 예정이다. 뉴욕한인회는 19일 오전 총영사관 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기로 했다. 범미주 뉴욕동포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위원회는 플러싱 열린공간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19일 오후 7시 열린공간에서 추모식을 거행한 뒤 조문객을 맞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추모위원회 이종인 전 국민체육관리공단 이사장은 “문동환 목사가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을 열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뉴저지한인회도 이날부터 장례일까지 오후 3~9시 분향소를 운영한다고 밝혔다. 또 김 전 대통령 미국 망명 시절 고인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동포 지인들과 미국인들도 18일 재미동포추모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에는 1972년과 1983년 김 전 대통령의 망명 시절 인연을 맺었던 인사 80여명이 참여한다. 위원장은 뉴욕의 문동환 목사가 맡기로 했으며 망명시절 고인의 비서실장 역할을 했던 이근팔옹,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미국대사 등이 포함돼 있다. 미 정부도 고인의 서거에 애도의 뜻을 밝혔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이날 김 전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과 한반도 평화 증진을 위한 지칠줄 모르는 노력, 자유를 위한 개인적 희생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용기있는 민주화와 인권 투사인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슬픔에 빠졌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고인과 각별한 우정을 과시해 온 빌 클린턴 대통령도 이날 빌 클린턴재단 홈페이지에 올린 성명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용감하고 강력한 이상을 가진 지도자였다”며 애도를 표시했다. 미 언론은 “아시아의 만델라 서거”라며, 김 전 대통령의 죽음을 자세히 보도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CNN을 비롯한 대부분의 미 언론은 김 전 대통령의 재임 당시 펼쳤던 햇볕정책과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 극복, 노벨평화상 수상 등을 주요 성과로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인들의 민주화 투쟁과 남북간 화해, 통일에 대한 염원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안준용 기자 jyahn@koreadaily.com

2009-08-18

[내가 아는 김대중] '망명의 설움, 꽃으로 달래'…문동환 전 평민당 부총재

평민당 부총재로, 망명시절에는 후원자로 DJ와 정치적 동반자였던 문동환 목사. 문 목사는 고인을 “정치와 통일, 꽃가꾸기가 낙이었던 분” 이라고 회고했다. 다음은 문 목사의 회고담. -DJ의 사망 소식을 처음 듣고 어땠나. "2년 전 만남이 마지막이었다. 평생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간절히 바랬던 분이다. 어느 정도 꿈을 이루었다고 보는데 세계화 문제 때문에 빈부화 격차 해소 못하시고 가신 게 마음 아프다." -처음 DJ를 만났던 때는. "1969년 3선 개헌 당시 장충단 공원연설을 들으면서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했다. 1~2년 뒤 기독교 정치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해서 만났고, 1977년 같이 옥고를 치렀다.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내가 세계교회협의회 모임 때문에 해외에 있었는데 한국 못 들어가고, 워싱턴DC에서 작은 교회 차렸다. DJ가 82년 미국으로 망명오면서 2년 동안 아주 가깝게 지냈다." -기억남는 장면 있다면. "책을 출판하면서 머릿글을 부탁해 내가 ‘신들린 김대중’이란 글을 썼다. 이 양반은 24시간 정치 밖에 생각 안한다. 놀란 것은 호텔에 있으면서 작은 화분에 꽃을 길렀다. 강한 정치인이 꽃을 기르는 것은 대조적인 것 아닌가. 왜 꽃을 사랑하냐고 물었더니 광주항쟁으로 감옥에 갔을 때 화단에서 꽃 기르는 것은 허가했다고 했다. 싹이 나서 자라는 것 보면서 생명과 기가 통했다는 것이다." -평민당 부총재로 DJ와 정치를 함께 했는데. "통일에 대해 도와달라고 했다. 그런데 형(문익환 목사)이 아닌 날 택하더라. 정치인은 보는 눈도 달랐던 것 같다. 목사가 정계 진출한 것을 놓고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난 DJ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실망할 것도 없었다. 많은 이들이 넬슨 만델라 같은 인물을 떠올리며 DJ도 그런 ‘지사’가 되어 주길 바랬지만 그는 정치인이었다. DJ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운동권 사람들을 안 썼다. DJ는 정치할 사람들이 필요했지만 그들은 정치할 줄 몰랐다." 강이종행 기자

2009-08-18

망명 베이스캠프…재임 때 두 차례 방문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있어서 미국은 베이스캠프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DJ 인맥이 주로 호남 출신 인사들로 축소됐지만 한때 반독재 운동 세력은 사실상 DJ가 평정하다시피 했다. 특히 미국 망명생활 2년3개월 동안 폭넓은 지인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민주화 인맥을 구축했다. ◇뉴욕인맥=뉴욕 동포사회에 동교동 가신 그룹에 버금가는 조직과 인맥이 형성된 것은 1982년 DJ가 미국에 망명한 이후부터. DJ는 망명 기간에 이근팔씨가 개인적으로 유지하던 자신의 워싱턴 사무실을 확대 개편하면서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만들었다. 인권문제연구소는 13개 지부가 운영됐는데 뉴욕에서는 이종인, 안병선, 김진옥씨 등이 지부장을 역임했다. 국민회의 정동채 비서실장, 박지원 기조실장, 김경재 의원, 유종근 전북도지사 등이 당시 DJ 측근 그룹을 형성했다. ◇망명시절=DJ는 1982~85년 미국 망명 시절 뉴욕과 워싱턴DC를 오가면서 뉴욕 동포들과 교류했다. 굴곡 많았던 고인의 정치 역정에서 고비고비마다 뉴욕 한인들의 힘이 큰 역할을 했다.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신문을 만들던 김경재 전 국회의원, 뉴욕한인회장을 역임한 박지원 국회의원 등이 당시 김 전 대통령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1983년 설립된 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미 전역에 지부를 두고 고인을 적극 지원하는 후원 단체 역할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85년 2월 7일 귀국길에 오르기 전날 뉴욕에서 지인들을 만나 작별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박윤용 한인권익신장위원회장은 “10여명의 지인이 퀸즈 포리스트힐에 함께 모였는데 김 전 대통령이 ‘동지’라는 표현을 사용해 아직도 기억이 또렸하다”고 회고했다. ◇야권 지도자=1995년 정계에 복귀한 김 전 대통령이 1997년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DJP 연대’의 불꽃을 올린 곳도 뉴욕이었다. 비전 21을 중심으로 김대중-김종필 연대를 통한 ‘준비된 대통령’을 내세워 그해 12월 대선에서 성공했다. 뉴욕의 비전 21 회원들은 97년 대선 당시 한국에서 직접 지원 유세를 벌이면서 한국 정계에 해외 동포사회의 수평적 정권 교체 열망을 전달하는데 한 몫을 했다. ◇대통령=고인은 대통령 재임시 뉴욕을 2차례 방문했다. 1999년 필라델피아시가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 수상, 2000년 UN 밀레니엄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UN 밀레니엄 정상회의는 남북 정상회담 직후였던 탓에 한반도 통일을 위한 뉴욕 동포들의 역할을 적극 주문했었다. 퇴임 후인 2007년 9월 코리아소사이어티 초청으로 뉴욕을 방문해 강연한 것이 뉴욕 동포사회와 마지막 만남으로 남았다. 미국 망명 일지 ▶83년 1월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정착 ▶83년 2월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창설 ▶83년 5월  에모리대 명예 법학박사 학위 ▶83년 6월 워싱턴,뉴욕 등에서 김영삼 단식투쟁 지원 데모 ▶84년 1월 뉴욕 유니온신학대학교 국제위원회 고문 ▶84년 12월 전두환 대통령에게 귀국 서한 발송 ▶85년 2월  망명 2년3개월만에 귀국 안준용 기자

2009-08-18

'영욕의 세월 잊고 부디 편히 가시길…'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접한 뉴욕 동포들은 한결같이 ‘큰 정치인’을 잃었다면서 안타까워 했다. 김 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동포들의 슬픔은 남다르다. 정원호 전 호남향우회장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한국 민주화에 기여했던 큰 별이 졌다”며 “남북 교류 물꼬를 텄고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IT산업 육성의 기틀을 세우는 등 한국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고 밝혔다. 김진옥 전 한국인권연구소 뉴욕회장은 “미국 망명시절 아무리 바빠도 매달 한 차례 뉴욕을 방문해 지지자들을 격려해 주셨다”며 “한국 민주화의 기틀을 닦은 역사적인 인물”이라고 말했다. 하용화 뉴욕한인회장은 “한국 역사의 큰 페이지를 장식한 별이 졌다”면서 “고인은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선구자이며, 남북한 교류의 물꼬를 트신 장본인인데, 50만 동포와 함께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고 싶다”고 밝혔다. 김기철 전 뉴욕한인회장도 “대한민국의 큰 지도자, 큰 인물이 가셨다”면서 “한국의 정치가 민주적이지 않았을때, 민주화 투쟁하신 것이 기억에 남고, 그런 분이 있었기에 지금의 정치 현실이 가능한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김근옥 퀸즈한인회장은 “김대중 대통령과는 같은 고향”이라며 “옛부터 무척 좋아하고 마음속으로 항상 존경하던 분인데, 서거 소식을 듣고는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퀸즈한인회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분향소 설치 방안을 강구 중이라고 덧붙였다. 뉴저지에 사는 주부 이은화씨는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그 분이 이룬 많은 업적들을 기억하면서 가신 분에 대해서 좋은 것만 생각하고 싶다”면서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 진심으로 애도한다”고 말했다. 회사원 김하나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 100일도 안돼 김 전 대통령까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면서 “혹시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견디기 힘들어서 같이 간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뉴저지에 사는 권국씨는 “우여곡절 정치 인생 끝에 많은 일을 남기셨다”면서 “국민들에게 걱정을 끼친 부분도 있었지만, 다 뒤로 하고 편히 가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애도했다. 단체장들도 김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한편으로 김 전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허흥택 뉴욕한인태권도협회장은 “대한민국을 위해 큰 일을 하신 분이며, 안타깝고 고인을 위해 명복을 빈다”면서도 “그러나 고인은 햇볓정책을 바탕으로 북에 지원을 많이 했는데, 결국 지금의 핵 문제를 야기시킨 빌미가 된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신동찬·조진화 기자

2009-08-18

[특별 기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합니다

우리 겨레의 큰 별 후광 김대중 전 대통령이 18일 향년 85세로 서거하였다. 지난 달 13일 다발성 장기부전 등으로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신 뒤 여러차례 마지막 고비를 넘기실 적마다 회복의 기적이 일어날 것을 믿어오던 온 국민과 해외동포 그리고 정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정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인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일생은 진정 인동초와 같았다. 몰아닥친 추위로 온 대지가 꽁꽁 얼어 붙은 때에도 새 봄이 찾아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하얗게 덮힌 눈 속에서 방울들을 머금고 파란 잎사귀를 펴는 한 송이의 동백꽃이었다. 다섯 차례의 죽음의 고비를 비롯해 연거푸 옥살이와 가택연금 두 차례의 망명 생활에도 불구하고 초지일관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온 그. 그대셨기에 이에 감동된 다수 국민의 힘으로 헌정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이루어 제 15대 대통령이 되었다. 사람이 하늘이자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보편적인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던 그는 4수 끝에 대통령이 되자 우리나라는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넘쳐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올라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햇볕정책은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를 넓혀 민족 통일에 이르는 길은 열어 높았을 뿐 아니라 21세기에 접어들어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동북아시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옛날부터 동양에 인권과 민주주의와 상통하는 사상이 있어서 이 지역에 평화 정착이 가능하다고 당신께서는 그해 12월 10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사람 섬기는 것을 한늘 섬기듯 하라'는 동양사상을 설명하였다. 그러시면서 당신은 "저는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민족의 통일을 위해 기꺼이 투쟁한 수많은 동지들과 국민들을 생각할 때 오늘의 영광은 제가 차지할 것이 아니라 그 분들에게 바쳐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미주 한인들과는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두 차례의 미국 망명생활에서 추진되었던 그의 인권 및 민주화 투쟁은 미주 한인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모아 귀국 후 본국에서 그 열매를 거두었다. 또 '서울의 불바다' 위기를 잠재운 것도 그가 1994년 5월 워싱턴에 와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평양에 보내 김일성 주석과 담판을 지어야 한다고 빌 클린턴 대통령에게 제안하였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1992년 4월 LA 폭동 때 민주당 대표로 와서 2500명의 한인 피해자들과 50만 남가주 한인들을 위로해 주었다. 김 전 대통령은 해외 동포들이 조국의 값진 재산이라고 소중히 여겨서 '재외동포특례법'을 제정해 국내 동포와 여러 분야에서 똑같은 권리릉 인정해 주기도 하였다. 오오~큰 슬픔이여! 이제 당신은 우리 곁을 떠나 가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남겨주신 교훈과 모범 지난 50년 동안 잃어버렸던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민족화해를 당신께서 행동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자유와 평화 그리고 통일을 위하여 전진해 나갈 것을 다짐합니다.

2009-08-18

[특별 기고] 선생님은 행복한 지도자셨습니다

김대중 선생님의 영전에 올립니다. 선생님 출국하려고 짐을 꾸리다가 지금 막 당신의 부음을 들었습니다. 아 한 시대가 끝났구나! 라고 짤막하게 한탄했습니다. 돌이켜보면 1970년대에 선생님께서 앞장섰던 민주화 투쟁의 대열에 함께 동참했던 것이 저와의 첫 번째 인연이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몇 차례의 사선을 넘어 80년 광주의 고비에 이르렀을 때 저는 광주에서 수많은 젊은이와 선후배들을 떠나보내야 했지요. 문익환 목사님과 방북한 뒤 베를린에 머물고 있던 시절 저를 만나 걱정해 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귀국 후 투옥되었다가 선생님의 배려로 사면석방되었지요. 제가 선생님과의 인연을 이렇듯 몇 가지 회상해 보는 것은 동시대인으로서 선생님의 고난과 역경을 목격하고 안타까워했던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면에서 또한 이름 없는 수많은 민초들이 겪었던 삶의 어려움도 선생님은 함께 겪어 오셨다는 점에서 결국은 행복한 지도자셨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정치 초년 시절부터 혁신적인 통일관을 주장해 오셨으며 그 때문에 사상적으로 오해받고 핍박을 당해 오셨습니다. 당신을 폄하하여 지역주의의 원천인 것처럼 공박하는 이들이 있지만 이는 오히려 권력을 위하여 억압하는 쪽에서 형성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동서의 갈등과 이른바 호남 차별은 우리 사회에서 고질적인 편견이 되어 왔으며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운명적으로 소수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지요. 군사정부 이후 처음으로 찾아온 직접선거의 때에 김영삼 선생과의 후보 단일화가 실패하면서 우리는 좌절했고 정당과 정치의 전국화는 함께 좌절되었습니다. 당시의 그 통한스러웠던 새벽이 생각납니다. 그 빚은 고스란히 남아서 영호남의 분할과 변하지 않는 지방 토호 세력의 정치 세력화 그리고 아직도 민주화되지 않은 형식적 민주주의와 정당 등이 우리의 개혁을 기다리고 있지요. 선생님께서는 나라의 통일과 평화를 위한 선구자의 길을 걸어 오셨습니다. 김구 선생님의 남북 단일정부를 위한 희생과 노력이 있은 뒤에 전쟁이 일어났고 반세기가 넘도록 분단과 반목에 얼어붙었던 상황을 단숨에 걷어 버리신 선생님의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의 쾌거를 역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같은 해 12월에 수상하신 노벨 평화상은 분단된 반세기 동안 전쟁과 냉전의 땅에서 한을 풀지 못하고 죽어간 수많은 혼령들에 대한 하나의 위안이요 날마다 대포를 베고 자고 깨어나는 남북 민중의 염원을 달래준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냉전체제가 끝난 뒤에도 80여 개의 나라들이 분쟁을 겪었으며 1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계 각처에서 희생되었습니다.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근대화라든가 혁명이라든가 자유와 해방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수많은 사회적 낭비와 우여곡절의 상처를 남긴 뒤에야 겨우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도처의 역사적.사회적 경험에서 배웁니다. 경직된 남북의 상황이 그나마 풀리는 듯한 조짐이 보이는 이 무렵에 선생님께서 영면하신 것이 한편으로는 다행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안타깝습니다. 민족의 원로로서 평화와 통일을 위한 조언과 가르침을 더 해주실 수 있었을 텐데요. 선생님의 뜻을 이어 우리는 기필코 선진적 민주주의의 완성과 민족의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어 낼 것입니다. 선생님 이제는 편히 쉬십시오.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칭송 받았다'

미국의 주요 언론은 18일 새벽 전해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주요 뉴스로 전하면서 김 전 대통령의 생전 업적을 자세히 소개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CNN을 비롯한 대부분의 언론은 김 전 대통령의 재임 당시 펼쳤던 '햇볕정책'과 IMF(국제통화기금) 경제위기 극복 노벨평화상 수상 등을 주요 성과로 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인들의 민주화 투쟁과 남북간 화해 통일에 대한 염원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신문은 김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이뤄진 남북 첫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전례 없는 긴장완화 분위기가 조성됐으며 김 전 대통령의 대북 포용정책인 햇볕정책으로 200만명의 한국인들이 북한 금강산을 방문하고 개성공단이 조성되는 등 성과를 이뤘다고 보도했다. NYT는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 약속 불이행 두 아들의 구속 정상회담 뒷거래 의혹 등으로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재임 말년을 보냈다고 전하기도 했다. 신문은 특히 김 전 대통령이 서방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WP)도 "한국 민주화 투쟁의 우뚝 솟은 인물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면서 "국제적으로 김 전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2000년 가진 남북 첫 정상회담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평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한국인들에게 김 전 대통령은 독재정권에 맞선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기억될 것"이라면서 "경제위기 속에서 집권한 김 전 대통령은 집권 후 한국에 대한 외국 투자의 문호를 열고 대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다만 김 전 대통령의 대북 관계개선 노력은 국제적 찬사를 받았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면서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은 북한의 핵무기 추구로 중단됐다"고 지적했다. CNN은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 당선 전 야당 지도자로서 수십년간 투쟁했으며 납치와 거듭된 체포 추방 사형선고 등의 고난을 겪었다"고 파란만장했던 인생 역정을 소개했다. 방송은 "김 전 대통령이 집권 직후 대북 관계를 개선할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서방 지도자들을 정력적으로 만나기도 했으며 2000년 6월에는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가지기도 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방송은 김 전 대통령이 혼재된 유산도 남겼다면서 김 전 대통령이 한국을 금융위기의 소용돌이에 빠져나오도록 도움을 줬지만 많은 경제개혁 약속이 실현되지는 못했고 두 아들의 수감을 포함한 일련의 부패 스캔들도 터졌다고 지적했다.

2009-08-18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오바마 '인권 투사…애도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18일 오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직후 이 사실을 보고받고 참모진들과 긴급 상황점검회의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이 병석에서도 우리 사회의 화해를 이루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거듭 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유족들과 잘 상의해 예우를 갖추는데 소홀함이 없도록 정중히 모시라"고 지시했다. 전직 대통령들도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에 일제히 안타까움과 애도의 뜻을 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아쉽고도 안타깝다"면서 "나라의 큰 거목이 쓰러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김기수 비서실장이 전했다. 최근 김 전 대통령이 입원한 신촌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해 쾌유를 빌기도 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상도동 자택에서 김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보고를 받고 무거운 표정을 지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측근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침통한 표정으로 "14일 문병을 갔었지만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실 줄 몰랐다"면서 "지난 수십년간 파란 많은 정치역정을 걸어왔는데 이제 천주님의 품에 안겨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기관지 수술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노태우 전 대통령은 TV 방송을 통해 서거 소식을 접하고 충격적이고 애통한 표정을 지었다고 노 전 대통령 측이 전했다. 한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18일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성명에서 "용감한 민주화와 인권 투사인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한다"고 밝혔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역동적인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운동을 일으키고 이끌어 오는데 목숨을 바쳤다"면서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칠줄 모르는 노력 자유를 위한 개인적인 희생은 고무적이며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9-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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